History legend

염제신농씨

천상옥경 2025. 5. 8. 00:01
반응형

염제신농씨

염제 신농씨는 강수(姜水: 陜西省 埼山縣 부근)라는 강가에서 낳았기 때문에 성(姓)은 강(姜)씨다.
몸은 사람이요 머리는 소(牛)였으며, 풍성(風姓)을 이어 천사가 된 화덕(火德)의 왕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교(有嬌)씨의 딸 여등(女登)이었는데, 화양(華陽)이라는 곳으로 놀러 갔다가 용의 머리를 보고 임신을 하여 신농씨를 낳았다고 한다. 이는 남방 화덕의 왕인 그가 동방 창용(蒼龍)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덕의 왕이기에 관명에 화자(火字)를 붙였다.
곡부(曲阜-현 山東省)에 도읍을 정하고 140년간 재위에 올라섰다.
그 이후 제승(帝承), 제림(帝臨), 제측(帝側), 제백(帝百), 제래(帝來), 제양(帝襄), 제유(帝楡)가 차례로 자리를 이어 받아,
義性의 천자가 8대 52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후 주(州), 보(甫), 감(甘), 허(許), 희(戱), 노(露), 제(齊), 기(紀), 이(怡), 향(向), 신(申), 여(呂)등이 있었는데
모두들 강성으로 제후가 되기도 하고 혹은 사악(四嶽: 사방 제후의 장관, 동서남북의 네사람이 있다.)을 갈라서 맡았다
주대(周代)가 되어 보후(甫侯: 侯는 侯爵) 신백(申伯: 伯은 伯爵)은 왕의 지혜로운 재상이 되었고,
제(齊), 허(許)는 제후의 서열에 끼어 중국을 제패했다.
생각해 보면 성인(聖人)의 덕택이 광대해서 그 자손들이 장구하게 번창했다고 전하여 내려온다.

신농씨는 본시 열산(烈山: 湖此省)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춘추좌씨전>에는 「열산씨의 아들을 주(柱)라고 한다.」고 했다.
그는 분수씨(奔水氏) 의 딸 청발이라는 여성을 들여서 비로 삼았다.
신농씨는 처음으로 나무를 깍아 쟁기를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서 자루를 만들어 <뇌사>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사제(: 12월에 여러 가지 동식물을 모아 하느님께 바치고 농경의 보고를 하는 것)을 행했다.
<18사략>「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그는 백생들에게 토지의 성질을 판별케 하였고, 그것에 따라서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쳐 주었다. 화신(火神)으로 태양빛을 충분히 보내도록 하여 오곡이 성장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인류는 의식(衣食)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는 그의 은덕을 기린 나머지 그를 신농(神農) 즉 농업의 신이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갓 태어나자마자 주의에는 저절로 아홉 개의 우물이 생겨 불이 솟아 올랐다고 한다.
그 우물의 물을 길으면 나머지 여덟개의 우물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가 인류에게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수많은 씨앗이 떨어졌다.
그는 이것을 모아 밭에다 심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먹는 오곡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전설을 보면 신농시대의 인류는 야생의 곡식을 인공 지배하는 방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농씨는 농업의 신일 뿐만 아니라 의약의 신이기도 한다.
그는 자편이라고 하는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의 약초를 채찍질했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각 종 다른 성질의 약초를 이용하여 병을 치료하였다.

또한 그 자신이 직접 각종 약초의 맛을 보았고 그로 인해 하루에도 70번씩이나 중독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농씨의 의약사에 끼친 공덕은 아직도 남아있다.
즉 산서성(山西省) 태원현(太原顯)의 부강(釜岡)에는 아직도 그가 약을 맛보았다고 하는 솥(鼎)이 있으며
성양산(成陽山)에는 그가 약초를 채찍질 했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그 산을 「신농원약초산(神農原藥草山)」이라고 부른다.

신농씨는 시장(市場)이라는 것을 두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즉,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시장이 서도록 하고 얼마쯤 지나면 끝나도록 했다.

링크 : https://youtu.be/yHM5ASrPEGo

 

마음에 드시면,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