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을 일으킨 은인
이름: 소하 (蕭何)
생몰년도:? ~ 기원전 193년
작위: 차후 (酇侯)
시호: 문종후 (文終侯)
고향: 패현 (沛縣) 풍읍 (豊邑)
소상국(소하가 한나라 건국 후에 상국에 올랐기 때문에 소상국이라 불렀다)은 유방과 같이 패현출신인데,
법령에 정통했던 그는 처음에는 현청의 하급관리 노릇을 했다
같은 고을에 살던 유방이 아직 이름없는 서민이었을 때,
소하는 관청에 관련된 일을 통해 자주 그의 편의를 보아 주었으며,
유방이 정장에 오른 후에도 이것저것 뒤를 보살피면서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생기게 되었다
언젠가 유방이 노역(勞役)의 감독관이 되어 함양으로 출발하게 되자,
다른 관리들은 노잣돈으로 유방에게 3백 전을 내놓았으나 소하는 선뜻 5백 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켜 패공이 된 후부터는 소하가 그 막하에서 줄곧 사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또한 유방이 진나라를 무찌르고 함양에 입성했을 때 남들은 앞을 다투어 보물 창고로 뛰어들었지만,
소하만은 금은 보화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진나라의 법령과 문서들을 입수하여 보관해 두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틈만 나면 그 문서들을 꺼내어 공부를 하였다
그 후 유방이 한왕에 책봉되자 소하는 재상의 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진나라가 멸망할 때에 항우는 제후들과 함께 함양 시내를 깨끗이 불살라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그에 앞서 소하가 진나라 조정의 문서들을 손에 넣고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천하의 요새, 인구 상황,
각국의 전력, 백성의 고충 따위를 소상히 파악해 전략에 이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신을 등용하라고 진언한 것도 소하였다
그의 추천으로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했던 것이다
후방 병참 기지의 역할
한고조(유방)가 동쪽으로 진군하여 3진(진의 옛 영토로 관중 일대를 가리킨다) 지방을 정복하고 있을 때,
소하는 승상으로서 후방에 머무르며 파
․ 촉의 통치 기간을 굳건히 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며 군량을 확보하였다
또한 고조가 제후들과 더불어 초나라를 공격하던 와중에도 소하는 관중에 머무르며
태자(여후가 낳은 유영을 가리킨다
후의 효혜제)를 받들고 수도 역양의 제도 정비에 열중했다
즉 법규를 제정하고 종묘를 세웠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궁궐을 건설하고 지방 행정을 정비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모든 일을 고조에게 품신하여 그 허락을 얻은 후에 실행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자기 재량으로 처리하고 나서 반드시 고조의 사후 승낙을 받았다
그는 항상 관중의 가구수와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전선(戰線)으로 물자 보급을 계획적으로 행하였다
당시 고조는 자주 패하여 그때마다 병력의 손실이 적지 않았으나,
소하가 수시로 관중에서 병력과 식량을 지원했기 때문에 전선에� 마음놓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후방 병참 기지가 튼튼해야 전쟁에 이긴다는 것은 이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 이듬해에 고조가 항우와 대치하여 일진일퇴의 어려운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자주 후방으로 사자를 보내 소하의 노고를 위로하곤 하였다
그러자 포생이라는 자가 소하에게 충고했다
“몸소 전쟁터에 나가 계신 대왕께서 모진 비바람과 찌는 듯한 더위, 살을 에이는 듯한
혹한(酷寒)에 시달리면서도 후방에 있는 승상에게 사자를 보내 노고를 위로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승상에게 의심을 품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제 말씀에 일리가 있다면 이렇게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승상의 가족과 친척 중에서 전쟁터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자는 모조리 뽑아 보내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상께 대한 신임이 지속되고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포생의 말을 들은 소하는 과연 그렇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러자 고조는 크게 만족하여 소하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사냥개와 사냥개를 부린 사람
한나라 5년, 드디어 항우를 격퇴하고 천하를 평정한 고조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각기 자기의 공적을 내세웠기 때문에 1년이 넘도록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조는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자는 소하라고 선포하고 그에게 가장 넓은 땅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공신들은 입을 모아 불평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제일선(第一線)에 나아가서 많은 사람은 백수십회,
적은 사람도 수십 회씩은 전투를 겪었습니다
공적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목숨을 걸고 성을 공략하고 땅을 빼앗는 싸움을 치룬 것입니다
그러나 승상 소하로 말하자면 단 한 번도 싸움터에 나가 본 일이 없고,
다만 후방의 책상위에서 붓대나 놀리면서 문서 쪽지만 뒤적거렸을 따름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어찌 우리보다 윗자리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그러자 고조가 대답했다
“귀공들은 사냥이라는 것을 아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냥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쫓아가서 잡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그 개의 끈을 풀어 주어 달려 나가게 하는 것은 사람이오
그대들은 도망치는 짐승을 쫓아가서 잡아 온 셈이니 공을 따지더라도 사냥개의 공이라고 할 수 있소
그에 비하면 소하는 그대들의 끈을 풀어 주어 뛰게 한 자니, 이는 요컨대 ‘사람’의 공적이오
뿐만 아니라 그대들 대부분은 그대의 몸 하나만을 가지고 짐을 따라 왔소
그런데 소하는 자기 일족 중 싸울 수 있는 장부 수십 명을 차출하여 전쟁터에 내보냈소
그 공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신하들은 아무도 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다
제후에 대한 영지의 분배가 끝나고 이번에는 서열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모두가 입을 모아 아뢰었다
“조참 대감께선 몸에 70여 군데 상처를 입도록 싸웠을 뿐만 아니라 그 공로 또한 누구보다 큽니다
그분이야말로 제 1위에 해당합니다
고조는 이미 공신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소하에게 가장 큰 영지를 내준 바 있으므로,
서열 문제에 관해서는 신하들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역시 소하를 첫째 자리에 앉혔으면 하였다
고조의 눈치를 챈 악군이 앞에 나서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의 의견은 다소 편파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연 조참 대감으로 말하면 대단한 업적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다 넓은 안목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는 항우와 싸우시던 5년간 싸움에 패하여 부하를 잃고
폐하 혼자서 탈출을 꾀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소하 대감은 관중에서 보충 병력을 보내 폐하를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폐하의 명령이 있기도 전에 수만 명의 부대가 위급한 전쟁터에 달려 오곤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형양성에서 한 ․ 초 양군이 수 년에 걸쳐 지겨운 공방전을 전개할 당시에도, 식량이 떨어질 만하면
관중에서 보급이 오곤 하여 우리는 배고픔을 모르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또 폐하께서는 산동에서 여러 번 패하셨습니다만,
소하 대감은 폐하께서 언제든지 귀국하시어 재기의 터전을 잡을 수 있도� 관중을 끝까지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만세(萬世)에 빛나는 영원한 업적입니다
조참 같은 분을 백 명 잃었다 해도 우리 한나라가 망해 없어지겠습니까? 또한
조참 같은 분이 백 명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우리 한나라의 방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일시(一時)의 공을 만세의 공보다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소하 대감을 제 1위, 조참 대감을 그 다음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조는 속으로 기뻐하며 말하였다
“과연 악군의 말이 지당하오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소하에게는 커다란 특전이 주어졌다
임금 처소에 오를 때도 신을 벗지 않고 칼도 차게 허용되었으며,
궁중에서 보통 신하들과 달리 종종 걸음을 치지 않아도 된다는 특별 대우를 해 준 것이다
고조는 또한, “인재를 추천한 자도 후한 상을 받을 만하다고 들었소
소하의 높은 공적도 악군의 추천이 있어 더욱 빛났던 것이오
하며 악군의 벼슬을 한 급 올려 주었고, 소하의 형제 10여 명에게도 각기 영지를 주었다
또한 소하에게는 따로 2천 호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했다
이로써 고조는 그 옛날 노역 감독관으로서 함양으로 떠날 당시,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사례금을 준 소하에게 보답한 것이다
몸을 보전하는 방법
한나라 10년, 진희라는 자가 한단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는 스스로 토벌에 나섰는데 그가 없는 사이에 이번에는 관중에서 한신이 책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다행히 소하의 계략에 의하여 여후가 한신을 처치했다
이 보고를 받은 고조는 사자를 파견하여 소하를 승상에서 상국으로 승진시키고, 5천 호의 영지를 더 하사하는 한편
5백 명의 호위병을 소하에게 붙여 주었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모여 소하의 지략을 치하하는 가운데
유독 소평이라는 자만이 가시돋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소평은 진나라 시대에 동릉후로 지내다가 서민으로 강등된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장안의 동쪽 변두리에서 참외를 심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참외의 맛이 뛰어나 ‘동릉 참외’라는 평이 자자했다
그가 동릉후였으므로 그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상국이 된 소하에게 소평이 말했다
“이번 일은 귀하에게 재난의 근본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전쟁터에 나가 계시고 귀하는 나라 안에서 집이나 보고 있었습니다
화살 한번 맞아 보지 않은 귀하에게 영지를 더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호위병까지 붙여 주셨는데
그건 무엇 때문일까요? 한신이 모반을 꾀하였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승상까지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호위병을 붙인 것은 결코 귀하를 위해서가 아니올시다
이런 경우에는 영지의 하사를 고사(固辭)하고 귀하의 전 재산을 처분하여
군비(軍費)로 헌납하는 편이 귀공의 위치를 오래 보전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폐하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 그 말이 과연 그럴 듯하다고 여긴 소하가 소평의 충고대로 이행하자, 고조는 크게 흐뭇해했다
한나라 12년 가을,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이번에도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군중(軍中)에서도 고조는 거의 매일 사자를 파견하여 국내의 근황을 조사하였다
소하는 황제가 없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의 협력을 얻고,
진희의 반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재산을 헌납했다
그때 그의 집안에 머물던 어떤 식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머지 않아 상국의 일족이 몰살당하실 듯합니다
깜짝 놀란 소하가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식객이 말을 이었다
“본래 귀공께서는 상국(相國)의 지위에 있고 국가에 대한 공적도 최고위에 있습니다
이제는 더 승진할래야 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상국께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관중에 머무르면서 민심을 장악하는 일에 힘써 오셨습니다
민심은 귀공을 따르고 있고 귀공도 민생 안전을 위해 공헌한 바 큽니다
그러고 보면 폐하께서 자주 사람을 보내오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혹시 상국께서 국내에서 반역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귀공에 대한 폐하의 의심은 극에 달해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논밭을 대량으로 사들이면
사들이되 싸게 사들이고 대금 지불은 일부러 질질 끌어서,
귀공에 대한 백성들의 평판을 스스로 떨어뜨리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도 안심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소하는 지체없이 그의 충고에 따랐다
이 소문이 전해지자 고조는, 소하가 백성의 신임을 등에 업고 역모를 꾀할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경포의 난을 토벌한 고조가 귀국 도상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고조가 가는 길에 지방 사람들이 길을 막고 고소장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내용을 알아 보니, 상국 소하가 1만 금 가까이나 되는 백성들의 전답(田畓)을 강제로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귀국 후 소하가 입궐하자 고조는 빙긋이 웃으며,
“귀공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돈깨나 모았다면서!” 하고 사람들의 고소장을 모두 넘겨 주었다
“상국이 직접 나서서 사과하는 편이 좋을 거요
그러면서도 백성의 불신을 받고 있는 소하가 한편으로는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이때 그러한 고조의 미묘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소하가 백성의 편에 서서 이렇게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장안에는 농지가 매우 부족한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궁궐에는 광대한 토지가 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농작물을 거둬들일 때 짚을 베지 말고
그대로 두게 하면 새나 짐승의 먹이도 될 것이니 두루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끊임없이 소하에게 품고 있던 고조의 우려에 불을 붙인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조는 별안간 안색을 달리했다
“귀공은 상인들에게 뇌물이라도 받아 먹은 것이 아니오? 내 정원을 내놓으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고조는 즉시 옥리를 불러 소하를 감옥에 투옥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왕이라고 하는 시종무관이 고조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하에게 무슨 중죄가 있기에 별안간 투옥하셨는지요?”
이에 고조가 대답하였다
“진나라 대신 이사는 좋은 일은 모두 군주의 덕으로 돌리고 나쁜 일은 모두 자기 탓으로 돌렸다고 들었는데,
소하란 자는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아 먹고는 내 정원을 개방하라는 둥
자기가 백성들의 덕망을 모으려고 꾀하고 있었어
그래서 잡아 넣고 규명해 볼 셈이야
이에 시종무관은 말했다
“폐하의 그 말씀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직무 범위 안에서 백성에게 보탬이 될 만한 일을 소청(訴請)한다는 것은
재상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아 먹었다고 의심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하로 말씀드리자면 폐하께서 몇 해 동안 전쟁터에 나가 계실 때나
진희나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가셨을 때에도 줄곧 관중을 지키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런 절호의 기회조차 이용하지 않던 소하가 이제 와서 장사치의 뇌물 따위에 한눈을 팔겠습니까?
진나라의 예를 드셨습니다만
진나라야말로 충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사도 그런 패거리 중의 한 사람인데 어찌 본보기가 되겠습니까?“
고조는 불쾌한 표정을 짓기는 하였으나 그날 중으로 명령을 내려 소하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하는 나이도 늙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가 착하기만 한 사람이어서 고조의 처사를 원망할 줄도 모르고,
풀려나자마자 즉시 맨발로 고조 앞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러자 고조는 이렇게 말하였다 “좋소
그대는 백성을 위해 간청했는데 짐은 허락하지 않았어
어차피 짐은 걸이나 주와 같은 폭군이며 그대는 명재상이오
그대를 투옥한 것도 실은 짐의 밝지 못함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나보오
효혜제 2년, 소하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손 중에 죄를 범하고 신분을 박탈당하는 자가 생겨 4대로서 가문이 멸망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널리 손을 써서 그의 혈통을 찾아내 벼슬을 계승케 했다
소하야말로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이 없는 공신이었던 것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소상국은 진나라 시절 일개 도필리에 지나지 않았고 공적 또한 특별한 게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황제의 빛에 편승하여 직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백성들을 위해 법을 새롭게 적용시켰다
한신 ․ 경포 등이 주살되었지만 그의 공은 찬란히 빛났다
지위는 신하 중 가장 높았고, 명성은 이후에도 지어졌으니
굉요(주 문왕의 친구로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산의생과 공적을 다툴만한 안물이었다
우리는 소하의 처신처세를 배워야 합니다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전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겸손한 자세
그리고 주군을 받들고 모자람이 없도록 살피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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